『건축은 어떻게 아픔을 기억하는가』
 김명식 저 / 뜨인돌 펴냄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세월호 추모관까지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악의 평범성에 대해 건축은 기록돼 있는 언어라고 저자는 말한다.
한국 현대 건축의 선구자 중 한명으로 평가받은 김수근(1931~1986)이 설계한 두 건물이 나온다. 하나는 남영동 대공분실이고, 다른 하나는 경동교회이다. 

 역사는 늘 역설을 머금고 피를 마시며 자라는 듯하다. 남영동 대공분실 509호, 과거 박종철 군이 고문 끝에 사망한 곳이며, 현재는 그를 기리는 여러 추모의 물품이 전시돼 있는 공간이다. 
공간의 탈바꿈이 민주화를 상징하는가는 재차 물어볼 질문이다. 민주화는 공동체를 염원하면서 철저히 개인의 의식이나 인권을 존중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 피해를 입은 분들에게는 개개의 위로가 먼저야 하고, 그것의 대안이 마련되고 문제 발생의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바로 사회적 합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대한민국의 건축에는 사회적 합의가 미비하다.
서울시청의 옛 건물인 서울도서관에 위치한 서울 기록문화관에는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것이 있었다. 바로 공간의 연대기적 구성표였다. 효순이 미순이 사건부터 최근의 세월호까지 역사를 자랑하는(?) 표가 과연 온당한 것인가. 여기에서 내 마음을 답답하게 했던 서술이 책에는 단 한 줄로 요약돼 있었다.

 ‘부끄러움을 기반으로 통제하는 사회냐, 아니면 죄의식으로 통제하는 사회냐에 따라 슬픔과 분노를 다루는 방식이 다른 것 같습니다.’ 부끄러움은 익명 속에 대중에게 잊혀짐을 강요한다. 반면에 죄의식은 독일처럼 사건을 숨길 수 없고 그 문제는 내 것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기억해야 하고 반성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연대표는 추모하는 것이 아닌 언제든 대체될 수 있는 소모의 상징으로 생각한다.
 공간은 여기에서 저기까지 틀을 재단하는 도구가 아니다. 밖에서 안으로, 혹은 안에서 밖으로 열려 있는 소통의 매개체가 돼야 한다. 

 황산 옥매광산 희생사건 광부의 조형물이 들어서는 시점에, 약간은 즐겁고 호기롭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매우 씁쓸하다. 책을 덮으면서 드는 물음이 있다. 수많은 죽음의 이력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소통할 것인가.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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