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 태 정(해남읍지편집위원장)

 조선 정조 때인 1782년에 김서구가 해남현감으로 내려왔다. 그는 정조에게 해남의 토호세력들의 기를 꺾어놓겠노라고 장담을 하고 부임을 했다. 해남현감들은 매일 아침, 아침재를 넘어 마산면 장촌리로 문안인사를 다니느라 정무를 보기 힘들었다고 한다. 풍수에도 능했던 그는 금강산에 올라 해남을 내려다보았다. 문필봉에 해당하는 호산과 신안리 앞 생미재, 해남의 관문인 우슬재가 거슬렸다. 김서구는 호산과 우슬재는 1m를 깎아내리고, 생미재는 허리를 잘라 해남의 기를 눌러버렸다. 그 뒤로 해남에 인물이 나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물론 호산은 해방 이후에 해남의 정기를 바로 세우기 위한 강현선 씨의 노력으로 다시 복원되었다.

 군 신청사 건립을 앞두고 현재의 건물 뒤에 외롭게 남아있는 해남읍성 성벽 일부를 허문다고 한다. 민원실 앞 도로 확장과 안정상의 문제가 그 이유란다. 사라진 것도 복원해야 할 마당에 기존에 있는 것까지 허문다는 그 가벼움에 마음이 무거워진다. 해남읍성은 낙안읍성처럼 둘레 2.7km로 해남읍을 둘러싼 웅장한 평지성이었다. 인근 고을 중에서도 유일하게 을묘왜변을 막아낸 자랑스러운 성이었다. 그 흔적이 수성송으로 남아 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대부분 훼손되고 옹색하게 남은 읍성의 흔적이 현재의 성벽이다. 해남읍을 둘러보라. 외지에서 오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보라고 추천할 것인가? 해남읍다운 게 무엇인가? 모두 밀가루블럭으로 쌓아 올린 40~50년 내외의 어정쩡한 건물들뿐이지 않은가? 로마는 조상 덕에 먹고 산다고 한다. 그만큼 유물과 유적을 보존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문화란 그곳에 사는 사람의 배경이요 향기이다. 장미꽃에 싸인 화장실은 향기가 날 법도 하지 않은가. 문화란 현재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과거와의 단절에서 오는 것은 정체성이 없다. 나주는 2005년부터 나주읍성을 복원하고 있다. 객사인 금성관 앞에 있던 나주군청 건물을 허물고 국비를 지원받아 내아 터와 성문도 복원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가보자. 이제는 해남읍성도 복원 계획을 세워야 한다. 기왕에 새 청사를 짓는다니 기왕이면 외곽으로 빼자. 새 청사를 외곽으로 배치한 고흥을 눈여겨보자. 새 청사는 상징성보다는 교통의 편의와 행정업무가 강조되어야 한다. 물론 현재 군청 주변의 상권이 위축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읍성 복원공사가 끝나는 시점을 생각해보자. 매년 600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해남을 다녀간다고 하는데, 그들이 해남읍을 거쳐 가는가? 읍성의 복원은 그들을 해남읍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볼거리이다. 하회마을의 별신굿탈놀이처럼 주말마다 해남의 자랑인 강강수월래를 읍성 마당에서 올리자. 강강수월래 종주권과 일자리 창출, 볼거리 제공까지 한꺼번에 얻을 수 있다. 그렇게 두어 시간 관광객을 읍내에 붙잡아두면 식당과 매일시장, 상점 등이 자연스레 살아날 수 있다. 해남읍을 살릴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를 생각하자.
한때 20만을 넘었던 해남의 인구는 8만의 마지노선도 허물어졌다. 갈수록 인구는 줄어들 것이며 언젠가는 인근 고을과 거점형 도시로 묶이게 될 수도 있다. 그때 가서 해남은 무엇의 거점이 될 것인가. 
멀리 보았으면 좋겠다. 당장 눈앞의 수월함만 보지 말았으면 좋겠다. 후손들에게 읍성의 흔적을 사진으로나 보여줄 텐가. 그때 우리가 자랑스럽게 허물어버렸노라고. 지금 우리에게 그럴 자격이 있는가. 호산을 복원하여 해남인의 자존심을 회복하고자 했던 그 1m의 기개를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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