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준호(청년국악인)

 셋째 아이를 낳았다. 통제구역이라는 팻말이 먼저 보이는 신생아실에서 셋째 성현이를 안고 사진을 찍었다.
“이렇게 여유롭게 사진까지 찍는 아빠는 처음 봐요.”
성현이가 세상에 빛을 보게 도와준 간호사가 내게 건넨 첫 말이었다. 셋째를 어떻게 키울까하는 복잡한 생각은 들지 않았다. 배냇저고리에 쌓여 길게 하품하는 성현이가 내 품에 안겼다. 며칠 후면, 내 어깨에 얼굴을 비빌 아이의 체온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하늘이 주신 최고의 축복이었다.
아내가 셋째를 임신했을 때, 나는 셋째를 갖지 않았을 때를 떠올렸다. 아내와 나는 같은 직장에서 예술활동을 하고 있다. 맞벌이를 하다 보면 갑작스런 직장공연으로 두 아이를 챙기기가 어려운 점이 있다.
첫째와 둘째 아이를 자식처럼 돌봐주셨던 예찬어린이집 원장님은 그런 의미에서 우리 가정에서 가족과 같은 존재이다. 그게 큰 힘이었다. “은형아빠 걱정 말아요, 성빈이 동생 태어나기만 하면 잘 봐줄게요.”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과 공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든든했다.
실제로도 원장님뿐만 아니라 원장님 가족들도 우리 아이 둘을 품에 안아주었다. 한 아이를 키우는데 온 마을이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원장님 가족이 마음과 행동으로 우리 눈에 보여 주신 것이다.
우리 부부 내외는 언제나 그 점을 감사히 생각한다.
감사함은 늘 마음속에 차곡차곡 포갰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셋째는 망설여졌다.
판소리명창이 되고 싶은 아내는 십년 가까이 자신의 꿈보다는 출산과 양육에 주력했다. 꿈이 멀어지는 데 아내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옆에서 지켜보는 나는 미안함이 가득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아이들 터울을 고려해 셋째 계획은 2~3년 전에 있었다. 그간 다둥이 아빠들의 모습을 볼 때 느끼는 부러움도 한몫했다.
그때 만난 다둥이 아빠들의 모습을 떠올린다. 그들의 몸은 지쳐 보였다. 한 사람이 한 우주라면 세 사람은 세 우주이지 않겠는가. 세 우주를 어깨에 지고 있는 아빠의 모습이라면 그 모습이 퍽 고단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런 피로와는 별개로 마음에는 평안이 깃들어 보였다.
쌍둥이 아빠가 된 친구 주영이는 한 녀석이 새벽녘에 보채고 울면 또 한 녀석이 깨어나 집안이 난리가 났다든지, 한 녀석의 똥 기저귀를 갈고 숨을 돌리려고 하면, 다른 녀석이 기저귀 갈아달라고 보챈다든지 등의 이야기를 하면서도 얼굴에서는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별 이야기도 아닌데, 행복을 공감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행복이란 결국 아이의 미래를 그리며 열심히 사는 것이지 않겠는가.
비단 다둥이 아빠들만의 모습은 아니었다. 바로 내 아버지의 모습이기도 했다. 살아생전 아버지는 쌍둥이인 나와 동생이 태어나자 걸음걸이부터 달라졌다고 했다. 씩씩해졌고.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의기양양해졌다고 어머니는 내게 말해줬다. 자식을 낳고, 더 열심히 일하시던 아버지와 나는 세대를 초월해 재회했다. 첫째 은형, 둘째 성빈 그리고 막내 성현이를 떠받친 내 가지에는 아버지의 호흡이 있었다.
나는 세 아이의 아버지가 됐다. 한 가정의 아들이었던 내가 한 가정의 아버지가 되려면 어떻게 변해야 할까를 고민한다.
한 아이가 자라기 위해 둘러본 지역, 아이의 키 높이에서 바라본 보도블록의 높이, 아이의 세발 자전가가 지나갈 운동장, 놀이터 등이 새록새록 눈에 들어오는 것은, 이제 청년 국악인 박준호의 모습에 갇힐 것이 아니라 지역에서 아이를 키우는 아버지의 모습으로 확장됐기 때문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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